5.03. 음악에 대한 사적인 사색
블로그 산책을 해보면
극히 소수의 달개비같은 일부 블로그외에는 늘 음악이 같이 게시된다.
블로그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과 생활속에 음악은 호흡같고 물같은 존재이다.
이 우주는 모든 것이 파동일수도 있다는 물리학적 견해를 볼때
모든 원자구성입자의 운동성, 또는 비선형파동에 대해
지금 여기서 언급하기엔 너무 방대하고 역부족인 일이므로 다음 기회로 미루고
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달개비의 경험상으로 표현하자면
삼라만상이 삼라만상만큼의 각기 다른 고유의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텅 비워진 때
우주의 많은 악기 중 하나로서의 나, 그 나를 통과하는 우주의 소리를 듣는다.
사실 이 경우 듣는다...라는 표현은 적절치 못하다.
그것은 그저 울림만 있다고 해야하나......그런 깊은 울림만 남은 상태.....
음악, 음의 궁극은 또한 다른것들과 마찬가지로 우주의 본질과 닿아있음을
그것은 곧 내가 소리와 다르지 않음의 경험이었다.
중국 여불위의 여씨춘추(呂氏春秋)에 나오는 음악의 장 중 몇 대목을 인용하면
[[음악의 기원은 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음악은 도량(度量)에서 나왔으며, 태일(太一, 우주의 본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태일에서 양의(兩儀, 천지)가 나오고, 양의에서 음양이 나왔다.
천하태평, 만물안녕함으로 모두 위(上)에 화하여 악(樂)이 이루어질지니, 기욕(嗜欲)하거나 벽(邪僻)하지 말고 악에 힘쓸지어다. 악에 힘쓰는 데는 술(術)이 있으니, 반드시 평(平)으로 말미암아 나온다. 평은 공(公)에서 나오고, 공은 도(道)에서 나온다.
고로 오로지 도를 얻은 사람만이 그와 함께 악을 말할 수 있다고 할까.
무릇 악은 천지의 화(和), 음양의 조(調)에서 비롯된다.
망국(亡國), 육민(죄 있어 멸망할 백성)에게도 악(樂)이 없지 않으나, 그 악은 즐겁지 않다.
......고로 악이 치(侈-浮)할수록 백성은 더욱 답답하고, 나라는 더욱 흔들리고, 임금은 더욱 천(卑)하다. 이는 곧 악의 정(情)을 잃음이니라.
무릇 성왕(聖王)이 악을 귀히 여기는 소이(所以)는 그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하걸, 은주는 치악(侈樂)을 작위(作爲)하여 강한 음으로 미(美)를 삼고 중(衆)으로서 흥이 있다고 하였다. 신기한 음향을 노리고 귀가 아직 듣지 못한 바를 힘써서 서로 지나치고 도량을 쓰지 않았다.
초(楚)가 쇠한 것은 무음(巫音)을 작위한 탓이다. 치(侈)한 것은 치함이라. 유도자(有道者)가 이것을 보면 악의 정(情)을 잃는다. 악의 정을 잃으면 악이 즐겁지 않다. 악이 즐겁지 않으면 그 백성은 반드시 원망하고 그 생(生)을 반드시 다친다. 이는 악의 정을 모르고 치로써 일을 삼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고로 치세(治世)의 음은 쾌이(快易)하다. 그 정(政)이 평하기 때문이니라. 난세의 음은 원망하고 노한다. 그 정이 그릇되기 때문이니라. 망국의 음은 애잔하다. 그 정이 위태롭기 때문이니라.]]
음악의 기원과 거의 잊혀진 음악 본래의 의미를 일깨우는 글이다.
어떤 음률이 때로 우리의 가슴을 열어버리게 하고
슬픔을 가라앉히고 아픔을 치료하기도 하고 집단엑스터시를 경험하게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수 밖에 없겠다 싶다.
이런 새삼스런 글이나 말이 사실 궂이 필요한가라는 생각이 물론 든다.
그저 한번쯤은 늘 보던 각도가 아닌 조금 다른 각도, 또는 포괄된 각도의 시선도
우리 삶의 풍요로움에 필요한 것이 아닌지 싶다.
음악이라는 것이 사람이 만들어낸 것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 이 우주 자체가 거대한 하나의 오케스트라이고
매순간 변화무쌍한 대교향곡이 이 순간도 흐르고 있다는.
우리는 또한 그 우주교향곡의 한 소절 한 소절이라는........
달개비마음을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