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6. 자아 + 신체 = 실존(켄타우로스)대역의 현존과 각성
움.. 이 문장을 원래는 맨 아래에 썼었는데 이렇게 서두로 옮겨놓는 것은
아주 작은 달개비의 노파심이라는 것을 밝혀둔다.
모처럼
무후가 몸에서 일어나는 통증을 관하고 그것에 대한 언급의 글을 올려주었기에
몸과 자아의 통합대역인 실존(켄타우로스)대역에 대한 말을 하다보니
이리 긴 글이 되고 말았는데 글이 길면 일단 질리기부터 하는 경우를 많이 봐온터라...... ^^
도반들은 읽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고 그냥 재미있는 티비화면 보듯이 가볍게 읽어나가시기 바란다. 생각보다 재미있을 것이라 사료된다.
참고로 '의식의 기본구조' 포스트를 참조하면 좀 더 이해가 체계가 있을 것이라 본다.
1]. 따타따에서 공부하는 의식대역
따타따에서 공부하고 언급하는 의식의 대역은
주로 초개인대역 약간과 합일의식, 그리고 궁극의 의식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초개인대역과 합일의식은 과정과 정점으로서의 도달할 수 있는 대역인데
궁극이라는 불이의 대역은 사실
물질대역, 생명대역, 심리(자아, 이성)대역, 켄타우로스대역(심신합일 - 자아 + 몸), 초개인대역, 합일(공)의식대역 이 모든 의식 대역들의 근본 바탕 그 자체이기 때문에 사실 따로 대역이라 이름붙일 수 조차 없는
이 모든 의식의 스팩트럼들이 펼쳐지는 장 자체이어서 이 모든 의식의 대역들을 포함 초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 어떤 의식의 대역들도 불이의 장에서 벗어난 대역일 수 없고 열외될 수 없기도 하다.
다만 그러한 모든 대역에 대한 공부는 워낙에 그 량이 지엽적이고 방대하고 그 모든 대역의 공부를 하나하나 다 하려다가는 평생을 가도 견성이나 깨달음은 고사하고 그 한 대역에 대한 공부도 다 마치기 어렵다.
그래서 그러한 중간 대역에 대한 공부는 대체로 각자에게 맡기거나 생략을 하는 편이고, 또 정 그러한 중간 대역의 공부(때때로 이러한 중간 영역을 깨달음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다반사다.)를 원하는 경우에는 그러한 대역의 전문가(?)에게 보내는 편이다.
그렇다 해도 공부자가
이러한 각 의식의 대역에 대한 그 의식의 정점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깨달음이라는 의식이 어느 영역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관점에서라면
어떤 의식의 대역이라도 우리는 충분히 논의할 수 있고 공부할 수 있다.
달개비 경우 대체로 전의식대역에 대한 체험과 과정들이 있어서 그렇게 체험된 부분에 있어서는
도움을 줄 수 있다.
물론 로또번호를 맞춘다거나 물건들을 공중에 붕붕 띄운다거나 공중부양을 한다거나 하는 영역의 체험은 없어서 그런 공부는 도움줄 수 없다.
개괄적인 따타따에서 공부하고자 하는 의식의 대역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하고
오늘은 켄타우로스대역 또는 실존대역(여기서의 실존은 실존경험주의 철학의 실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 현존의 실존이다) 또는 유기체통합 즉 심신합일이라는 대역에 대한 언급을 하고자 한다.
2]. 실존(켄타우로스) 대역
의식대역의 심층적 구조에서 볼 때
물질 - > 생명 -> 심리이성 -> 실존(켄타우로스) -> 초개인 -> 합일(공) -> 불이
화살표 방향으로 갈수록 더 깊은 깊이와 수준을 갖는 의식수준이다.
대략 말하고자 하는 실존(켄타우로스)영역이 어느 영역인지 짐작하라고 그냥 수직선상으로 언급한 것이다.
물질에서 합일까지 비선형의 원의 상태이고(수직선상이 아니라) 그 통체로 겹둥지 원 자체가 불이라고 이해하면 그나마 좀 나으리라.
그 여러 대역 중 합일의 영역에서 볼 때
신체도 자아도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세상 우주도,
인식이라는 작용일 뿐이고, 마음바탕에서 벌어지는 한바탕 꿈이고, 물거품이고,
그러한 모든 색수상행식이라는 오온의 감각이 멈춰버리면 그어느것도 실재가 아니였음을
보게 된다.
또한 그러한 제행의 제법의 성품을 본후 공의 체득이 깊어져 무아의 바탕에서 즉 주체와 객체와 합일된 의식의 바탕에서 다시 떠오르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이제 더이상 꿈도 꿈이 아닌것도 아닌 즉 비현현과 현현이 따로가 아닌
매순간 진여의 현현으로서의 나툼, 온갖 시끄러움이 지극한 고요함인, 온갖 무명과 탐진치, 에고가 그대로 보리이고 반야인 불이의 화엄세계가 펼쳐진다.
또 초개인대역인 마음자리에서는
부동하고 여여한 마음바탕에서 그 모든 것들이 생하고 멸하는 것을 관조하는 주시자의 현존도 있다.
그런데 자아 - 페르소나 대역이나 실존대역에서는
자아, 몸등은 그렇게 환상이고 물거품이고 실재하지 않는 허상이 아니라
또 객체와 주체의 분리가 없는 비이원적 세계가 아니라
엄연히 나와 너가 있고 고통받고 기뻐하고 펄떡펄떡 뛰고 있고 시간과 공간이 있고
주체와 객체가 있는 상대적 세계인 것이다.
어떤 자의 현존에서 볼 때
그 현존의 의식수준은 각자 천차만별이고 기본의식 수준대역의 어떤 의식은 상당히 성장하고 발현되었는가 하면 어떤 의식대역은 그곳에 트라우마가 있는 자아정체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로 더이상의 발달이 멈춘채 그 대역에 고착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그 대역이 자아 - 페르소나 수준일 수도 있고
켄타우로스 대역일 수도 있고
초개인대역일 수도 있고
드믈지만 합일의식 대역일 수도 있다.
그러면
실존대역이라 불리우는 켄타우로스 대역의 '건강한 실존'상태부터 말하자면
정신과 신체의 통합된 상태이다.
정신 - 신체적 유기체 내부 전체에 심리적 - 신체적 건강이 이미 순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이다.
자아가 시간 속에 살면서 이익을 얻고자 미래로 목을 길게 빼고, 마음 속으로 과거의 손실을 한탄하는 데 비해, 켄타우로스는 언제나 현재의 흐름, 스쳐가는 구체적인 현제, 어제에 매달리거나 내일을 희구하지도 않는 살아있는 현재, 즉 눙크 풀루엔스(nunc fluens)속에 산다.
이 순간의 선물에서 충만함을 발견한다. 물론 영원한 현재, 눙크 스탄스(nunc stans)는 아니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통합되어야 할 순간이고 대역인 것이다.
이러한 실존각성은 오로빈도가 말한 '치명적인 충격'이라고 불렀던 즉,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육체의 취약성에서 오는 충격과 위축, 육체를 무감각하게 하고 각성을 왜곡시키는 위축이라는 심신분리의 병적 상태를 치유하는 해독제다.
(여기서 실존각성을 발현시키고 훈련하는 일련의 과정은 따로 시간을 내어 글을 올리기로 약속하고
심신분리의 병적상태에 대한 언급과 건강한 실존의 현존만 간략하게 하고 넘어가자.)
<불건강한 실존 - 심신분리의 병적상태>
자아대역에서 자아가 페르소나와 그림자로 분리된 병적 자아에서 그림자와 페르소나의 통합으로 건강한 자아로 성장 통합하는 것처럼(분리된 그림자는 자아의 무의식화된 일부분이지만 투사를 통해 저밖의 적으로 간주되고 자아를 괴롭히는 외적인 환경이 된다. 그리하여 그림자와 페르소나의 통합은 근원적인 고통이 해소되는 과정이다.)
실존대역의 병적인 상태는 자아와 신체의 분리감이다.
자아는 통제와 조작의 지위에 있고, 수의적이고 의지된 활동의 장이다.
실제로 자아는 정의상 오직 수의적이고 의지된 활동의 장이다.
반면 신체는 기본적으로 혈액순환, 소화, 성장과 발달, 신진대사 등과 같은 불수의적 과정들의 잘 조직된 집합체이다.
예를 들어 '나는 팔을 움직인다'고 말하는데, '나는 심장을 뛰게 한다'라던가, '나는 피를 순환시킨다'라는 표현은 드물다.
즉 자아는 수의적이고 통제 가능한 행위와만 동일시하고, 그 나머지 모든 자발적이고 불수의적인 작용들에 대해서는 자기도 아니고 비자기도 아닌 모호한, 또는 신뢰할 수 없다고 느낀다.
유기체의 절반을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 자기 존재 전체의 일부와만 동일시 한다는 것은
분명 병적인 분리다.
오히려 자아는 제멋대로 구는 신체의 피해자이고, 골치아픈 처지에 놓였다고 까지 느낀다.(성욕, 식욕, 수면욕, 배설욕 등등을 처리해 줘야 한다는 식의.)
이와 같이 육체에 속박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현생에서든 이승에서든 육체의 나약한 취약성을 벗어나 영혼이 최상의 지배권을 갖고 육체를 떠나 영원히 산다는 상상과 욕구를 일으키는, 또 육신과 죄가 동의어처럼 사용되는 것등의 배후이유이기도 하다.
자아는 특히 신체의 고통에 대한 취약성으로 인해 덫에 걸려 있다고 느낀다.
고통, 괴로움, 살아있는 세포조직과 신경의 엄청난 예민함 - 이런 것들이 자아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만 일이기도 하다.
또한 자아는 고통의 근원에서 철회하려고, 신체를 마비시키고 동결시켜서 신체의 고통에 대한 취약성을 감소시키려고 한다.
자아는 신체의 불수의적인 감각을 통제할 수는 없을지라도(때때로 또는 다른 대역에서는 통제도 가능하다) 신체 전체를 둔하고 무감각하게 만들고 신체로부터 각성을 철회하는 것을 배워서 그 후유증으로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신체가 고통의 근원인 것은 확실하지만, 동시에 쾌락의 원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아는 고통의 근원을 죽이는 동시에 쾌락의 원천도 말살시키는 꼴이다.
이렇게 만연된 감각의 결핍은 신체로부터의 위축과 실존의 분열이 가져온 병적인 분리감상태인데
이러한 분열은 건전한 자아조차도 어느 정도까지는 수반하고 있다. 이러한 분열은 오직 자신의 자아와만 동일시하는 한, 정의상 자기는 유기체의 자발적인 과정을 포함 할 수 없으며 통합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깊이의 감각, 의미있는 느낌의 기반, 내적인 각성과 느낌-주의의 원천이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러하게 분리된 정체감에서 신체에 대한 회복, 다시 통합하려고 할 때, 두려움과 저항을 일으키는 데
(존재감, 자기감 자체가 합일의식으로부터의 저항인 것처럼 그리고 그 저항의 기저는 죽음과 연결되는 것과 같이) 거기에는 많은 종류의 이유가 있지만 일단
표면적인 수준에서는 자아는 신체에 관심과 애정을 가질 별다른 소득없는 공연한 짓이라는 생각, 즉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정신에 비교해 상대적으로 육체를 천대하고 경시하는 경향성),
좀 더 심층적인 수준에서 보면, 사회적으로 금지된 강렬한 감정과 느낌들이 너무나 생생하고 살아있는 형태로 신체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고,
궁극적인 면에서 볼 때는 신체를 회피하는 것은 그것이 죽음의 제단이기 때문이다.
(참 의식의 한 대역에 대하여 말해야 할 것이 이토록 많다니 어쩔수 없이 중간생략 중간생략 한다.)
<건강한 실존현존>
그리하여
마음과 신체, 수의와 불수의, 의지한 것과 자발적인 것 사이의 분열이 치유되고 통합될 때
자기감과 실재감에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불수의적인 신체과정들을 자신으로 느낄 수 있는 정도만큼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피상적인 의지와 자아의 소란을 넘어서 있는 심층적인 자기에 대한 믿음을 갖고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자발성에 안주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자신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통제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수의적이면서 또한 불수의적인 양쪽 모두를 자신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더 이상 자신을 신체나 불수의적이고 자발적인 과정전반의 희생자라고 느끼지 않게 된다.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의식적으로 통제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느끼는 것에 대해 다른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탓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 깊은 책임감이 발달하게 된다.
궁극적으로 자신은 불수의적인 과정과 수의적인 과정 모두를 만들어내는 심층근원이지, 그 피해자는 아니다.
불수의적인 과정을 자신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수의적인 과정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즉 머리카락을 더 빨리 자라게 한다던지, 피를 거꾸로 흐르게 한다던가, 위장이 쓰림을 멈추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과정들이 수의적인 것과 똑같이 자기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자신과 세계를 강박적으로 조작하고, 억지로 통제하고, 창조의 책임을 떠맡으려는 만성적이고 헛된 시도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그러할 때 확장된 자유감을 느끼게 된다.
의지에 찬 자아가 의식적으로 한번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마도 두세 가지 정도?
하지만 전유기체는 자아의 어떤 도움도 받지 않고, 지금 이 순간 복잡한 소화과정에서부터 신경전달이라는 복잡미묘한 과정과 개념적인 정의 조정에 이르기까지 한 번에 문자 그대로 수백만 가지 과정을 조정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자아가 그토록 자랑하는 피상적인 술수보다 어마어마한 지혜를 요구한다.
실존(켄타우로스)의 각성으로 현존할 때
이 광대한 자연스러운 지혜와 자유의 보고에 기초해서 삶을 살 수 있게 되고, 자신을 그것에 위임할 수 있는 능력도 향상된다.
<결론>
수의와 불수의의 과정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이 두가지 모두가 실존의 자발적인 활동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기실 의지와 의도적인 결정에 기초한 행위조차도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또한 알아차리게 된다. 자아의 자유의지같은 것은 없다. 그리하여 현재속의 영속적이고 계산되지 않은 삶을 이끌어 간다.
실존각성은 단지 자아와 신체의 합을 넘어선 그 둘을 통합한 일종의 전체성으로서 많은 실존대역의 심리학자들의 이름표로 말하자면 이 전체성의 확장된 잠재력을 '자기실현'(여기서 자기는 셀프를 말한다), '자율성', '삶의 의미'라고 한다. 실존주의, 인본주의 심리치료법이 목표로 하는 대역이 바로 이 실존대역이다.
건전한 자아도 이루고, 자아의 목표, 물질적인것, 직업적인 것,
그 모든것을 이루었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죽음뿐이라는 것이 확실해 졌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삶 속에서 자아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삶 속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고,
어느 시점까지 그것은 적절한 것이다.
그러나 자아를 넘어선 곳에는 그런 종류의 의미를 넘어선다.
실존각성의 현존은
삶 자체의 과정이 기쁨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외적 행위나 소유에서가 아니라 그저 '존재'의 빛을 발하는 자신의 내적인 흐름이다.
삶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삶에서 죽음을 수용하는 것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무상함과 동지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숨을 내쉴 때마다 자신을 공속으로 해방시킴이고 자신을 아무 조건 없이 죽음에 양도하는 것이다.
숨을 들이 쉴때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매순간 교차하는 참으로 미묘한 대역이기도 한다.
스쳐가는 현재.
따타따에서의 깨달음의 영역은 아니지만
우리의 현존이 거쳐야 하고 통합해야 하는 영역이고
실제 상당히 많은 현존이 이 대역의 제대로의 성장이 결여되어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긴 어디 실존영역뿐이겠는가
자아대역에서의 성장이 결여되어있는 현존뿐 아니라 사실 전대역의 병리가 태반인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