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 이미 여기인데..... 새삼

이미 부처다, 이미 이루어져있다.

이미 깨달아있다.

이미 비이원적의식과 현재는 하나이자 동일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언제나 현재에, 비이원적인 합일의식에 저항하고 있다.

현재경험으로 부터 물러나려는 움직임.

무엇을 하려하든,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든, 바로 그 움직임이 첫단계의 오류다.

결론부터 말하면,

비이원적 의식(깨달음)을 가로막는 것은 바로 자신이 그런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하고 있는 표면의식적, 무의식적 현재의 활동 즉 회피와 저항이라는 원초적 활동이다.

그것은 지금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는 것에 대한 총체적인 망설임, 보지않으려 하는 회피, 수용의 거부다.

사실 사람들은 <지금 여기로부터의 회피>인 모든 짓- 실은 깨달음을 원치않으며, 이미 깨달아있는 현존 - 현재경험에서 언제나 도망치고 외면하고 저항하고 회피하고 있다.

물론 그 '저항과 회피'가 '열심히 산다'이기도 하다.

공부자가 접근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비이원적 의식(깨달음 - <이미 여기>이므로 가고 올 수가 없다) 자체가 아니라 비이원적 의식에 대한 이 근원적 저항이다. 자신의 비이원적 의식에 대한 저항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 할 경우, 깨달음을 성취하려는 모든 노력은 허사로 끝날 것이다.

애쓰는 그것이 무의식적으로 저항하고, 또 애씀을 저지하려고 애쓰는 것의 반복의 악순환이기 때문이다.

표면에서 결사적으로 열렬히 소망하는 것을 심층에서 교묘하게 저지하는 일이 발생하고 이 저항이야말로 에고의 진정한 곤경이다.

바로 수행을 한다는 에고가 이런 구조의 '현실'이기 때문에 달개비는 무관점, 무선택적 알아차림 이라는 일종의 특수조건(사티)을 제시하는 것이고, 모든 함과 하지않음이라는 인위 - 저항을 좌절시킴으로써 보다 심층적인 무저항상태를 깨닫도록 저항을 드러내 보여준다.

제대로 된 사티는 자신이 어떻게 비이원적 의식에 저항하고 회피하는지의 발견을 할 수 있게 하고, 그러한 저항(회피)의 발견과 이해, 명도를 이루게 하며, 자신의 저항을 드러내 보여주는 동시에 저항을 좌절시킨다.

온통 저항이고 회피임을 보게하는 총체적인 통찰이 일어난다.

비이원적 의식에 대한 저항의 파악은 처음으로 그것을 다룰 수 있게 해주고 마침내 저항(무명)을 떨쳐낼 수 있게 해준다.

비이원의식 - 깨달음 - 현재경험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과 회피를 발견하고 이해한다는 것!

우리의 삶이,

몸짓이,

마음짓이

이 끊임없는 저항과 회피라는 것을 본다는 것!

이것은 그 자체가 매우 결정적인 통찰이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은 비이원적 의식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디로부터 어떤 식으로 달아나는 지를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이해 자체가 비이원적 의식을 약간이라도 드러나도록 해준다.

저항을 보는 것 자체가 저항으로부터의 자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