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 여정상의 주시자

내면의 주시자, 마음자리라는 것, 선에서의 부동지라고 하는 의식상태는 깨달음과 자아의 중간지역이라 할 수 있다.

마음자리는 지켜보는 자의 집이다.

마음자리의 단계가 확고해지면 지켜보는 자, 즉 진아로서의 자아가 확립된다.

그러나 주시자의 단계를 넘어서면 주시자는 관찰되는 모든 대상과 하나가 된다.

즉 알아차리는 대상과 하나가 된다.

주시자는 깨달음을 향한 최고의 존재면서, 동시에 깨달음 이전의 마지막 장벽이기도 하다.

주시자의 위치에서만 깨달음을 향해 도약할 수 있다.

그러나 주시자는 결국 죽어야 한다.

진여와 궁극적으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혼이라 할 수 있는 주시자마저 떨어져나가야 한다.

알아차림을 해보면 알겠지만 주시자란 마지막 저항, 수축이자 보편적 합일의식을 제약하는 가장 미세한 매듭이며, 분리된 자아 감각의 마지막 자아필터이기 때문이다.

즉 마지막 죽음이다.

가장 먼저 죽는 것은 물질적 자아, 그 다음은 정신적 자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시자를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이 없어진다. 선에서는 대사(大死)라고도 불리운다.

물론 주시자의 상태조차도 각 현존마다 사티의 순도, 사티의 힘의 차이와 그 깊이가 다르고

다른만큼의 마음자리에 대한 확고함, 또렷함, 고요가 다르다.

즉 관(사티, 알아차림)의 힘이 깊어질수록 무관점, 무선택의 사티로 최대한 가까워진 상태이다.

그러다 100프로 무관점, 무선택의 사티가 되어질 때 사티(알아차림)가 끊어진다.

막가파라에 대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는 일단 논외로 다시 주시자로 돌아와서,

주시자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향상으로, 여정에서는 아주 중요한 단계이다.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것은 될 수 없다.

주시자는 자아나 그 외의 정신적 대상을 자아로 동일시하지 않고, 단지 모든 대상을 공평하게 관찰하는 상태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아직 관찰하는 주체(주시자)와 관찰되는 객체(꿈같은 한바탕 법계로의 현상)라는 이원론이 아주 미묘한 형태로 남아 있게 된다.

주시자의 상태는 특정 대상을 자아라 여기지 않고 다만 공평하게 모든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마치 무아, 또는 진아인것 같은 착각을 하게된다.

또한 주시하고 있는 관의 상태가 너무도 또렷하기 때문에 그 주시를 하나된 각성(반야)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모든 삼라만상이 바로 그 마음자리에 비추이는데로 나타나는 것으로서 온통 마음으로 보이고 온통 마음뿐이고 그러하게 마음자리에 비추이는 꿈같은 현상으로 보인다.

주시자가 마지막으로 해체되었을 때, 주시자는 비로소 관찰된 모든 것 속으로 녹아들어간다.

주관과 객관이라는 이원론이 무너지고, 매우 단순하고 분명하며 순수한 비이원론적 알아차림만이 존재하게 된다.

보고 있는 자 자신이 보이는 자신이다.

오직 분명하고, 빛나며, 도도히 흐르는 현시만 있을 뿐이다.

그 때에는 더이상 꿈과 꿈을 꾸는 자라는 분리가 없다.

현상과 본성이라는 분리가 없다.

'나'라는 존재는 지금 생겨나는 모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진아 즉 참자아라고 이름 붙일수조차 없다.

이제 에고 - 진정한 자아 - 진아(self) - 주시자, 또한 그 너머....

그 모든 온우주가 있는 그대로 모두 곧 진정한 세계이고

여기에 분리된 것은 없다.

오직 둘없는 하나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