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 새삼
눈은 눈을 볼 수 없다는 말은 사물이 사물 그 자체로 있는 자리. 사물 본질의 장이다.
실재가 무아이기에, 무상이기에
제법유아가, 만법이, 삼라만상이 나투어질 수 있음이라는.
바탕으로서의 공 즉 본질이 어떤 모양도 어떤 색깔도 어떤 느낌도 아닌 그 어떤 대상으로 포착될수 없는 공(눈은 눈이 아니어서 눈이다, 보살은 보살이 아니어서 보살이다)이기에 모양과 색깔과 느낌과 갖가지의 현현이 도리어 현현되고 나투어질수 있는 현상의 한 가운데이다.
공이어야만 색일수 있음을, 무아이므로 유아일수 있음을, 무형상이므로 형상일 수 있음을 드러내는 현정이다.
즉 색이 색인것은 색이 아니기에 색인 것이다.
그대가 그대가 아니어서 그대이다.
눈은 눈을 볼 수 없다 즉 눈이 눈이 아니기에 눈이다.
색과 공의 관계, 진여의 성품과 그 성품의 나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눈은 눈을 볼수 없음'의 실재적 상태인 '공'에 대해서 조금은 견해공부를 해보자.
부정확한 지도는 실재영토를 걸어갈 때 혼란과 착각의 함정에 빠지게 한다.
일반적으로 '공'이라는 표현을 쓸때 두가지의 경우가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다.
1] 그 하나가 '공'의 비현현의 몰입, 지멸, 멸진정, 고전적의미의 해탈(열반)을 말할때의 '공'. 색즉시공의 공이다.
진여의식의 비현현적 상태이다.
그럴때의 공은 인과적 영역 즉 시원대역으로서의 하나의 상태이다.
모든 현상(색)이 일어나기 이전의 순수한 공의 비현현의 자재적 상태로서
현상의 나툼이 멈춰진 그래서 색이 사라진 공이다.
사라진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개아적 관점에서의 표현이고,
절관, 인식의 빔, 인식이 일어나는 그 바탕이 드러난 상태이다.
즉 색의 바탕으로서의 공, 고향의 공, 꿈없는 깊은 수면상태의 의식인데 보통의 깊은 수면과 다른 것은 깨어있음이다. 순수의식 상태이다. 처음으로 진여의 성품이 드러난 상태로서 견성(등각)이라고 한다. 선에서 말하는 마음자리, 부동지라고 표현되는 '주시자'상태에서 '자'가 떨어져 나가고 '주시자체'만 있는 상태이다.
붓다수행법에서 말하는 막가파라에서 막가에 들어가 니르바나에 있는 상태다.
그리하여 아래와 같은 또는 그 중의 하나인 여정을 거쳐 '공'에서 '여여'로 '불이'로 포함초월된다.
[그 여정에서의 공의 체득의 과정(4회정도의 막가파라 체험), 막가에 들어서 파라로 나올때의 각성, 각성과 반야의 관계로 등각에서 묘각까지에는 실제 여러 등차의 경우가 있다.
세세한 부분까지 언급하려면 무척이나 경우의 수가 많아지는데 몇가지만 대략 보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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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가파라후 아직 반야지는 발현되지 않은 경우.(막가의 깊이만큼 파라의 상태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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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가파라후 반야 켜지기 전에 각성(사티가 강해질때, 대상과의 밀착상태(삼매))이 강하거나 약하거나 없는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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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가파라후 반야가 켜졌는데 아직 약한 경우(발현에서 100프로까지의 또 등차 -전식득지과정상의 반야지 체득정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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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가없이 혜와 사티의 힘(각성)으로 해인삼매가 벌어져 반야가 켜진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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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가파라를 동반하며 동시에 해인삼매로 반야가 켜진 경우.
기타 등등의 수많은 경우가 있겠다.
이러한 경우에 따라 현존에서 벌어지는 상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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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경험되어진 앎의 기억으로(삼매일때는 공의 현존), 색은 여전히 색이어서 분리가 있는 상태(삼매밖에서는 색의 현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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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 색이 하나로 보여 분리감이 없다고 느껴지는 상태와 분리가 있는 상태가 교차 혼재되어있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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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 색이 하나로 분리는 없는 상태(공의 상주)인데 부분적으로 통찰력이 떨어지거나 부족한 상태(반야불의 밝기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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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 색이 통채로 하나이며 명확하게 꽤뚫어져 시공의 시작과 끝이 동시에 지금 여기 즉 하는 현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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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등등의 여러 현존이 있겠다.]
2] 또 하나의 '공'이라는 표현은 비이원(불이), 즉 공즉시색의 공이다.
공에서 '여여'(묘각)를 거쳐 '즉여'로의 여정이다.
진여의식이 스스로 눈을 떠 현현, 비현현 모두 꿰뚤어져 깨어있는 상태이다.
현현(색)에 대한 비현현(공)의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현현, 비현현 그 모두를 포괄하는
즉 의식의 전대역의 바탕, 실재의 의미로서 '공', '진여'이다.
둘도 없고 두번도 없는 즉각적 현시로써의 공, 진여, 즉 '즉여'이다.
그래서 불이의 차원에서는 따로 의식의 변형(사마디, 선정)에 들어가고 나옴이 없다.
이미 현현 자체가 공임을 적시하는 일이다.
그것은 공의 상주상태로 현상(색)과 현상의 본질(공)이 꿰뚤어져서(반야) 현현과 비현현이 동시에 하나인 진여(공 = 연기 = 환 = 진여)로의 공인 것이다.
참으로 필요없는 말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지도가 지도이지 실재영토가 아님을 잊지않는다면 언어가 그때서야 제대로 쓰여지고 대접받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