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 명상과 무의식 여정
명상, 수행을 의식의 성장, 발달, 심층의식으로의 전이라는 관점과 맥락에서 보자면 어떤 해석에 집중하거나 주시함으로써 다음 상위수준에서만 가능한 탈초점화에 의해 그 해석을 방해하는 것, 즉 하위의 에고적 해석을 단절시키는 것이다.
집중적이고 몰입적인 명상양식은 해석을 멈춤으로써
수용적이고 무관점적인 명상양식은 허용하고 주시함으로써
상위변형을 초래하는 하위 해석의 단절이 이루어지게 하는 구조이다.
여기서 잠시 그러한 수행방식들이 추구하거나 도달하는 의식계층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가자.
모든 명상학파가 똑같은 일반적인 의식의 영역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초개인적 영역과 초의식 영역은 실제로 몇 개의 다른 수준들로(저-고 정묘, 저-고 시원 등)분류된다.
이 모든 구분을 제대로 알고 있는 종교는 대단히 적은 편이며 많은 종교가 다소간 한두 수준에 '특수화'되어 있다. 실제로 명상수행 자체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 주요 부류로 분류된다.
첫 번째는 응신계층이다.
여기서는 신체적이거나 타이폰적인 에너지와 사하스라라에서 종결되는 저정묘 영역으로의 탈바꿈 또는 변형을 다룬다.
하타요가, 쿤달리니요가, 크리야요가 및 특히 모든 형태의 탄트라요가가 여기에 포함된다. 응신 계층의 묙표는 사하스라라, 왕관 챠크라에 도달하는 것이며, 이에 관해서는 파탄잘리가 좋은 예이다.
두 번째는 보신계층이다.
여기서는 고정묘 영역들을 다루며, 사하스라라 내에서 그리고 사하스라라를 넘어서 미묘한 성장과 가청광명의 일곱 가지(혹은 열 가지) 하위국면들을 목표로 한다. -미묘한 빛과 소리에의 몰입(일곱 번째 챠크라와 그 너머의 챠크라들)ㅡ
나다요가와 샤브드요가가 여기에 포함되며, 키르팔 싱이 좋은 본보기이다.
세 번째는 법신계층으로서, 여기서는 시원영역들을 다룬다.
의식의 시원적 장 자체에 대한 탐구를 통해, 나임I-ness 혹은 분리된 자아감의 근원에 대한 탐구를 통해, 심지어 시원영역에 대한 초월적 주시를 통해 모든 주객 이원론이 뿌리 뽑힐 때까지 작용한다.
이러한 계층은 스리 라마나 마하리시, 마하아티 금강승, 선 불교 그리고 베단타 힌두교에 의해 예증된다.
다시 돌아와서
명상수행은 현재의 에고적 해석을 멈추거나(공안), 또는 바라봄으로써(지관), 그러한 해석을 와해시키기 시작한다.
수행을 시작하고 내면으로 걸어들어가기 시작하면 즉 현재의 에고적 해석이 느슨해짐에 따라
역치 이하의 침잠 무의식(일반적으로 억압되지 않은 침잠 무의식)에 처음으로 노출되는데,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엄청난 양의 알아채지 못했던 경험의 측면들, 습관화된 측면들, 조건화 혹은 상황의 절박함'등이 포함되어 있다.
온갖 종류의 기억들, 즉 차단된 기억들, 사소한 기억들, 억압되지 않은 단지 망각했거나 전의식적인 기억들이 솟아오른다. 각성에 재등장하고 내면의 눈앞에서 춤추고 있는 역치 이하의 침잠무의식을 바라보면서, 명상자는 수개월을 영화를 보듯이 보낼 수도 있고, 주시의 힘이 약할 경우엔 그러한 무의식들의 휘몰아침에 함몰되거나 발목을 잡힐 수도 있다.
묻혀진 무의식이 '방해'받음으로써, 습관적인 세력은 느슨해지기 시작한다. 여기서 묻혀진 무의식적 해석들은 억압되지 않았지만 주어진 수준의 자아체계의 억압하는 측면들이었음을 상기하도록 하자. 따라서 자연스럽게 억압자가 이완됨에 따라 억압되었던 것들이 출현하기 쉬워진다. 말하자면 이제 억압된 침잠 무의식이 각성 속에 떠오르거나 때로는 분출하기 쉬워진다. 그 사람은 자신의 그림자(그리고 때로는 원시 무의식으로부터의 최초의 환상이나 원시적인 환상들)와 맞서게 된다. 그 사람은 수개월 또는 수년을 자신의 그림자와 씨름하면서 보낼 수도 있는데, 정통 심리치료가 명상을 보완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이곳에서 방출된 것은 억압된 침잠 무의식이라는 점, 그것들이 그림자에 대항하여 사용된 똑같은 방어들에 의해 차폐된 억압된 창발 무의식의 일부가 아닌 한 반드시 정묘적이거나 시원적 창발무의식은 아니다. 이런 일은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성 있는 일이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억압된 그림자에 대한 방어와 창발적 신에 대한 방어는 전혀 다른 체계이다. 이 지점까지의 명상에서는 기본적으로 전자를 대상으로 삼게 된다.
따라서 이 단계에 이르기까지 명상에서 일어난 것은 그 사람이, 에고적 해석과 그것의 묻혀진 무의식의 느슨한 해체를 통해서, 그 지점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삶을 되새겨 체험해 보는 것이 된다. 그는 자신을 모든 외상적 사건에, 고착된 것에, 열등감에, 심상들에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의 삶에서 출현했던 모든 이전의 의식수준들의 그림자들(즉, 물질적, 섭식적-우로보로스적, 타이폰적인 정서적-성적, 언어적 그리고 심적-에고적인 그림자들)에 개방하게 된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그 모든 것들이 돌이켜보아야 할 후보들이며, 특히나 '아픈 곳들', 즉 그의 존재의 처음 다섯 층에서 일어났던 고착된 것과 억압된 것들이 돌이켜보아야 할 주요 후보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것 중 어느 것도 아직은 중심적인 명상상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제 그 지점을 넘어 정묘로 나아갈 때
수동적 명상(전면적인 수용, 무관점적 주시)은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무의식으로 이끌어 가고, 반면에 몰입적 명상은 자체의 대상에 너무나 몰두되어 있어서 무의식으로부터의 메시지를 포함해서 그 밖의 모든 것이 인식에 입수되지 않으며, 그런 이유로 인해 무의식과의 직면은 그 대상이 버려진 이후에만 또는 수행이 완료된 이후에만 일어날 수 있다.
(그렇기는 해도 몰입적 명상방식의 정묘명상은 에고적 해석을 멈추는 데 도움을 준다)
몰입을 멈출 경우 그림자 유입에 개방된다. 물론 수용적 명상을 수행 중인 수행자는 언제 어떤 것이 일어나든 모든 것에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그는 억압을 중지한 바로 그 지점에서 그림자를 '보게 된다'.
처음 영향받는 것은 바로 가장 강력한 충동들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사라져 감에 따라 명상자는 보다 정묘한 것들을 깨닫기 시작한다. 마치 해가 지면 별이 보이는 것처럼. 그러나 이러한 보다 정묘한 충동들 자체도 마침내 사그러들고 훨씬 더 정묘한 것들을 구별하도록 해 준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연속된 과정이 아니다. 왜냐하면 좌선 중에 현 수준과 그 다음 더 정묘한 수준을 구분짓는 일종의 정신적인 '막'을 통해 지나가는 동안 막간의 침묵 또는 실직적 침묵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일단 이러한 구분이 지나가면 심적 정신적 활동이 회복된다.... 그러나 그러한 활동은 이제 훨씬 더 정교해지고 순화된 것이 된다.
'막'이란 단순히 다른 수준들을 차단하고 현 수준을 나머지와 분리하고 있는 각 수준의 해석과정일 뿐이며, '이러한 구분이 지나가면'이라는 말은 다시 더 상위의, 더 정묘한, '보다 순화된' 번역으로의 변형을 의미한다. 이런 식으로 수립된 새로운 역치(새로운 해석)자체는 지속된 명상에 의해 환원(변형)될 수 있으며, 이것 또한 변형될 수 있다. 각 경우에 하위 강도의 더 정묘한 대상들의 새로운 스펙트럼이 명상자의 내적 시야에 들어올 수 있게 된다.
어쨌든, 정묘적인 것 자체가 기저 무의식으로부터 출현하기 시작함에 따라 다양한 고원형적 광명과 직관이 일어난다. 보다 더 정묘한 해석들이 등장했다가 마침내 사라지면 새롭고 더 정묘한 해석으로의 변형이 일어난다는 점, 이것이 곧 정묘영역 내에서의 발달이다.
이들 정묘한 소리와 광명은 보신의 목표라 하더라도 이것들은 법신에 의하면 아직은 과정이다.
따라서 명상이 시원영역으로 지속해 갈 경우, 정묘든 조야든 이전의 모든 대상들은 시원영역의 초월적 주시 또는 나임(진아) 조차 공의 위대한 죽음 속에서 와해될때까지, 또한 비교될 것이 없는 오직 자연스러움의 명백한 상태에 이를때까지 진여로서의 의식의 몸짓으로 환원된다.
이것은 그 무엇에도 의지함이 없다. 이러한 최종적 변형에서는 해석자가 '사라졌기'때문에 거울과 거울에 비친 상은 똑같다.
아이투아이 참조
깨달음의 여행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신나고 즐거운 일이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특히나 어릴적 자아성장 과정에 트라우마와 왜곡과 억압이 많았던 자아의 내면으로의 여정에는 무수히 많은 함정(블랙홀)이 있고 그 함정에서 다음 여정으로 나아가는 고통과 혼란(어떤이에게는 지극한 지복감으로 겪어지는 것이기도 한)에 비하면
애초 떠나왔던 일상의 안전한 자아(익숙한 함정 - 관념의 세계)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은 비교가 불가능하다.
존재방식이 달라지는 일은 애초 한번도 원하거나 꿈꿀수조차 없었던 것이기 때문인데
그것은 기지의 것이 아닌 미지, 불가지에 당면하기 때문이다.
에고의 존재방식에서 출발한 여행은 에고의 결여 내지 소멸후에 벌어지는 존재방식과 처음 당면할 때
그동안 익숙했던 관념적 지복, 자유, 행복, 고통들은 더이상 축복도 지복도 또한 고통조차도 아니다. 남아있는 희미한 에고적 해석방식으로 그나마 간신히 붙잡아 보는 힘없는 이름표들일뿐.
자신의 내면으로 여행을 시작한 그대들
각자 여정의 현존만큼의 어려움과 편안함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어려움이란 자아 발달과정상의 억압과 고착 즉 병리가 있을 경우를 말하는 것이고
편안함은 그 억압과 고착에서 탈고착 탈억압으로 의식의 변용이 일어남을 말하는 것이다.
어려우면 어려운채로 편안하면 편안한채로 직시하고 깨어있자.
어찌하여도 괜찮다.
참으로
......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