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 눈
켄 윌버가 말하는 육안(감각경헝적 눈) - 심안(이성 정신의 눈) - 영안(관조의 눈)이 무엇을 말하는지 일단 개괄적으로 적어본다.
표현상 달개비식의 언어를 사용하였으므로 더 자세하게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캔 윌버의 - 아이 투 아이 -를 읽어보기 바란다.
육안(감각경험적 육신의 눈)
육신의 눈 - 코기타치오, 열등한/외면의 빛 -은 그 눈이 부분적으로 창조하고 또한 부분적으로 밝혀 낸 공유된 감각경험의 선택된 세계에 참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계는 '조대 영역 - gross realm, 즉 공간, 시간 및 물질의 영역이다. 이 세계는 비슷한 육신의 눈을 소유하고 있는 모든 존재에 의해 공유된 영역이다. 육신의 눈은 아주 비슷하기 때문에 인간은 어느 정도까지는 다른 동물들(특히 포유류)과 이 영역을 공유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개 앞에서 고기 한 조각을 들고 있을 경우 개는 반응할 것이다. 바위나 식물은 반응하지 않는다. - 필요한 지식과 지각에 필수적인 육안을 결여한 유기체에게 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조대영역에서는 어떤 대상이 A이며 또한 A가 아닐 수는 결코 없다. A이든 A가 아니든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바위는 결코 나무가 아니고, 나무는 결코 산이 아니며, 하나의 바위는 다른 바위가 아니다. 이것이 육신의 눈의 기본적인 감각운동성지각-대상 영속성-이다. 즉 감각적 경험의 눈이다.
심안(이성 정신의 눈)
이성의 눈 또는 일반적인 마음의 눈 - 메디타치오, 내면의 빛 - 은 관념, 심상, 논리 그리고 개념의 세계에 참여한다. 이러한 세계가 정묘영역 - 정묘의 하위부분 -이다. 너무나 많은 현대 사상이 전적으로 감각경험적인 육신의 눈에만 기초해 있기 때문에 심안은 육안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신장(mental field)은 감각장(sensory field)을 포함하지만 또한 초월해 있다. 마음의 눈은 육안을 배제하지는 않지만 육신의 눈보다 훨씬 솟아올라 있다. 마음의 눈은 상상 속에서 즉각적으로 현존하지 않는 감각대상을 그려볼 수 있다. 따라서 단지 현존하는 세계 속에 구속되어 있는 육신을 초월한다. 마음의 눈은 논리작용을 통해 감각운동적 대상을 내적으로 조작할 수 있으며 따라서 실제적인 운동계열을 초월해 있다. 마음의 눈은 의미작용을 통해 육신의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해소를 지연시킬 수 있으며, 따라서 단지 유기체의 동물적이고 인간 이하의 측면들을 초월해 있다.
마음의 눈이 정보의 상당부분을 육신의 눈에 의지하지만, 모든 정신적 지식이 엄격히 육체적 지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며, 오직 육체의 대상만을 다루는 것도 아니다. 즉 우리의 지식은 전적으로 경험적이고 육체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 말은 우리는 지성의 빛(내면의 빛 - 마음의 눈)을 갖고 우리의 신체적 감각으로는 볼 수 없는 사물들을 볼 수 있다. 관념의 진실은 우리의 감각으로 볼 수 없다는 슈마허의 말과 같다.
예를 들어 수학은 비경험적 지식 또는 초경험적 지식이다. 즉 육신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에 의해 발견되고 밝혀지며 권한을 부여받게 된다. 즉 어느 누구도 육신의 눈으로 마이너스 값을 갖는 평방근을 본 적이 결코 없다. 그것은 초감각경험적 실체이며 오직 마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논리도 마찬가지이다.
즉 수학에서, 논리상으로 더 나아가서 상상, 개념적 이해, 심리적 통찰, 창의성 등에서 우리는 육신의 눈에는 충분히 현존하지 않는 마음의 눈을 갖고 사물을 본다. 따라서 정신장이 신체장을 포함하지만 훨씬 초월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영안(관조의 눈)
이성의 눈이 육신의 눈에 그러한 것처럼 관조의 눈은 이성의 눈에 그러하다.
이성이 육신을 초월하는 것과 똑같이, 관조는 이성을 초월해 있다. 이성이 전적으로 육신의 지식으로 환원될 수 없고, 그것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조는 이성으로 환원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성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는 것이다.
이성의 눈이 초감각경험적인 것처럼, 관조의 눈은 초합리적이며 초논리적이고 초정신적이다.
영지, 지혜(반야) - 관조의 눈, 우월한 빛 -은 정신영역을 초월하며 감정(감각영역)을 넘어선 것이다. 이러한 초월은 '초자연적으로 자연적'인 반야의 기능, 즉 불변의 실재이자 의식이며 지복인 진정한 자아(무아, 공)의 관조에서 비롯된다.
해탈이라는 초월성과 언어적 세계를 초월하는 관조의 탐구에 언어적 절적성이라는 기본원리의 철학적 탐구는 포함되지만 초월한다.
이 공부를 하는 과정은 사실 '본다'는 것이 전부이기도 하다.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제대로(전면적이고 투명한) '알아차림' - 즉 순수의식의 깨어있음으로 보는 것 - 되어지는 현존으로의 여정이다.
그런데 어떻게 보느냐, 또 어떤 눈으로 보는가의 문제가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과연 궁극이라고 하는, 깨달음이라고 일컬어지는 존재의 실상이라는 것의 자증과 체득의 현존이 이 공부이고, 이 공부의 여정이고 바로 '그러한 이 모든 것'이 또한 궁극이라고 하는 '그것'의 나툼이고 현현이며 '그것'의 스스로의 증명임을 스스로 '보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가장 많이 일어나는 오류가 위에서 언급한 육안과 심안과 영안의 범주오류이다.
궁극이라고 하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존재의 실상을 육안으로, 또는 심안으로 보거나 볼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오류이다.
깨달음은 육안도, 심안도 넘어서서 바로 영안, 관조의 영역이고 관조의 눈으로 보는 실재인 것이다.
의식의 전대역에 대한 포괄적인 언급만으로도 몇날 몇일이 걸릴터이고, 또 그러한 육안과 심안과 영안으로 볼 수 있고 드러나는 경험적인 부분에 대한 언급도 차후로 미루고 그때 그때 도반님들의 질문과 언급에 관계된 영역들에 대하여 공부하기로 하자.
무애님의 '... '의 글은 그런 맥락에서 도반님들이 지금 당장 자신의 현존과 '알아차림 - 깨어있음'이 얼마나 정확하게 되고 있는지, 부정확한지, 부정확하면 어떤 오류들이 있는지, 그런 오류의 원인이 무엇인지 등을 스스로 알아차리고 검증해볼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진술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