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 알아차림 - 사티
이렇게 이름도 많고 실재 그 상태도 각각 조금식 다른 이것 - 알아차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거나 되는 일이
수행 초기에는 참 어려운 일이고 그래서 관건이기도 하다.
몇번 언급한 일이기도 하지만 새삼 다시 이해를 돕기위해 또 말한다.
알아차림은 자각능력이다. 즉 인식이 가능하게 되는 그 바탕이다.
식이라거나 마음이라고 하는 그 바탕의 각성능력이다.
평상시 우리가 인식한다는 것에는 동시에 알아차림 즉 사티가 항상 같이 있다.
다만 인식한 내용에 함몰되거나 집착하느라 바빠서 간과하고 있을뿐이다.
수행자가 알아차림을 시도해볼 때
처음엔 알아차림 자체를 자꾸만 놓친다. 또한 알아차리고 있다해도 순수한 알아차림이 아니라
비난, 비판등의 자신의 잣대(당위와 상정)로의 알아차림을 하게 되므로 무척 피곤하거나 지치거나 쉽게 알아차림을 놓치게 된다. 그래서 그러한 알아차림을 이미테이션 사티, 자의식 사티라고 이름붙인 것이다.
그러한 알아차림이라는 것을 꾸준히 시도해보면
경계 즉 매순간의 접촉 순간에 기억과 경험, 지식으로의 당위와 상정을 덮어서 인식해버리고, 그렇게 인식되어진 내용에 (이미 왜곡되어진 대상) 동일시하고 그렇게 동일시 하므로 끄달리고 집착하게되는 오래된 무의식적(자동적) 착각하는 버릇과 일련의 2차, 3차 연쇄반응이 어느새 섞여서 알아차림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런데 또 그러한 알아차림을 계속 꾸준히 시도해보면
점점 그러한 버릇도 알아차리게 되고 알아차린 만큼 그 버릇이 들어가지 않은 즉 과거의 경험으로, 자아라는 잣대로 알아차리는 것(자의식의 알아차림)이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점점 알아차리는 힘이 커지고, 알아차림의 순도가 투명해진다.
투명해질수록 혜(통찰)가 발현되고 성숙된다.
점차 있는 그대로의 접촉에 가까워진다.
점점 알아차리는 힘이 커지고 순도가 투명해질수록 대상과 알아차림과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즉 그 사이가 좁혀진다.
가까워진 만큼 정확하고 명료하게 보고, 그 보는 만큼의 전혀 처음 접하는 무수한 우주가 벌어진다.
인식과 대상사이에 자아감, 자아의 잣대가 끼여있다가 점점 자아감과 자아의 잣대라는 불순물이 빠진 순수한(무관점, 무선택적인) 사티가 되어지면서 대상과 밀착하게 된다.
그래서 그렇게 대상에 사티가 일시적, 또는 하나의 대상, 또는 모든 대상에 밀착되어진 상태가 삼매상태이다. 있는 그대로의 한 상태이다.
이러한 삼매의 상태는 아주 짧게는 몇 초간, 길게는 몇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삼매의 효과는 삼매 밖에 나와서도 짧게는 몇 일, 길게는 몇 달, 몇 년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알아차림이 깊어지면 이즈음엔 늘 마음자리, 그리고 사티(관)가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에
간혹 이 지점의 사티를 진아 또는 무아로 알거나(그 상태에서는 표면의식상 자아감이 없기 때문에), 마음자리가 곧 일진법계라고 착각하는 오류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사티가 온전히 밀착되어져 어떤 한 대상이 아니라 모든 대상과 하나되는 상태,
즉 순도 100프로의 알아차림상태일 때가 동시에 바로 그러한 사티라는 각성, 마음바탕 그 자체, 즉 본성으로의 자재상태이다.
즉 공에서는 사티는 순도 100이면서 동시에 0이다.
이 때가 그러한 삼매 중에서도 무상삼매인데
무상삼매에서는 사티도 인식도 인식자도 인식되어지는 대상도 모두 끊어져버린
무한, 영원의 열림 가이없는 공뿐이다.
여기를 막가라고 한다.
무상삼매에서 다시 일상의 의식으로 즉 사티 7,80 프로의 상태로 돌아나오는 것을 파라라고 한다.
사티100프로가 되기까지의 여정상 얼마나 통찰이 이루어졌는가 즉 혜의 성숙이 동반되었는가 (이 말은 알아차림 여정중 삼법인이 얼마나 체득되었는가와 같은 말이다), 또는 그런 과정이 많이 축적되지 않았지만(즉 혜의 성숙, 통찰이 없는 상태로) 일시적으로 사티가 100프로가 되어지는 깊은 몰입(간절함)으로 막가에 들었는가, 등의 여러 현존의 알아차려진 통찰만큼, 파라상태의 사티의 각성, 혜의 발현, 의식의 변용, 무의식의 부분해체정도, 반야밝기 등이 달라진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표면의식구조로의 알아차림의 시작에서부터
알아차림 100프로 상태, 즉 무관점, 무선택적 사티까지의 여정을 다시한번 잘 이해하고
이제 한 걸음 한 걸음 기꺼이 즐겁게(?) 걸어가보자
물론 이 여정에는 자유와 해탈이 있고 그것은 동시에 내가 죽어나가는 상실감을 동반한다.
가려는 시도도 해보지 못할수도 있고, 가다가 멈칫 망설일수도 있고, 가다가 엉뚱한 길로 빠질수도 있고, 잘 가다가 마지막 난관에서 차마...... 하고 있을수도 있고, 얼결에 실수로 풍덩 자신에게로 돌아올수도 있다.
참으로 자신으로 돌아오는 이 길은 각자 그대들만큼의 길이 있고, 그대만의 길이다.
그 길의 어느 여정에 서 있던지 진실로 그대는 이미 진리이고 이미 부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