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1. 사티에 대하여 답변
우리가 사티, 지관수행, 정혜를 닦는다, 바라본다, 알아차린다. 자각, 각성...... 이런 단어들을 사용할 때
사실 각자의 단어들이 가리키는 곳은 그 각자만큼이나 다르다.
비록 명상용어만 그런가, 일상의 모든 언어는 언어자체에 이미 전제와 당위와 한계를 가지고 시작한다.
또한 실재가 아닌 지도이며, 대표적인 이원적 표현도구이기 때문에 이러한 언어의 한계를 새삼 언급하지 않아도
이미 공부자가 공부길에 들어서면서 절감하는 부분이라고 본다.
그러나 진여의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말 자체는 헛소리인채로 참소리인채로 진여의 묘용으로서 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거듭되고 반복해서 진지하고 솔직하고 성실한 대화(말)를 통해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일정 기간동안 우리는 서로 다른 말을, 때로는 헛소리(^^)를 열심히 할 수 밖에 없음이다.
같은 실재를 가리키게 될 때까지......
그런 맥락에서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달개비 또한 사티, 알아차림, 주시, 각성, 자각, 자의식이라는 이름표를 빌어쓰지만 달개비의 사티, 알아차림, 주시, 각성, 자각, 자의식을 말할 수 밖에 없음이다.
우리가 사티수행을 한다라던가,
알아차려라, 주시하라, 자각하라, 깨어있어라 라는 등의 표현을 쓸 때,
사실 이 표현들은 매우 모순적이다.
마치 그것들을 하는 주체, 내가 있는 것같은 표현들이다.
사티 : 알아차림 - 주시 - 자각 이라는 것은
의지와 의도를 내어서 주체로서 내가 ~을 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 주체로서의 '내가'를 놓는 것이다.
바로 아래 글 '답은 질문이 사라진 곳에 저절로 드러난다' 를 보자.
나는 누구인가/ 이 무엇인가? 하고 물을 때, ---- > 이 물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관(위빠사나)이고 사티이고 간화선이다.
이 질문의 목적은 어떤 답을 얻는 것이 아니다. 답이 나온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사유의 결과물, 인식의 결과물, 마음 작용의 결과물,
즉 묻고 있는 그 당체가 이미 작용해서 내어놓은 결과물, 인식한 대상 아닌가
즉 사티라고 할 때, 알아차린다고 할 때, 깨어있다고 할 때는
묻고 있는 그 당체로 처음으로 있어봄이다.
질문도, 질문자도 부재다.
침묵이다.
무후의 답글을 잠시 보자.
중략......
하나의 상태를 과거의 것으로 인식하고, 현재의 것으로 인식하고, 미래의 것으로 인식하는 것,
하나의 상태를 과거의 것으로 알고, 현재의 것으로 알고, 미래의 것으로 아는 것,
이렇게 해서 뭔가 자신이 무엇을 하는가 하는 점을 알고, 느끼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것이 나라고 하는 동일시........
따라서
오로지 하나된 사고,
오로지 하나된 의도,
오로지 하나된 바라봄,
오로지 하나된 행동은
그 이름이 사고이며,
그 이름이 의도이며,
그 이름이 바라봄이며,
그 이름이 행동일 뿐이다.
그것은 결코 <알려지지 않는 것>이란 뜻이다.
바로 이렇다.
알아차리고 있다는 것,
깨어있다는 것,
자각한다는 것,
주시한다는 것의 실재상태는
'알려지지 않은, 알려질 수 없는, ? '
이 속에 그저 처음으로 그리고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않는', '처음으로 쉬는', '놓는', '그러하고 있음'에 처해 있는 상황이다.
이것이 '알아차림'이다.
즉 '내가 알아차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마음기능(사티 - 알아차림)에 나를 맡겨 투명하게 보게 하는 것이다.
알아차림 즉 자각은 본래 마음 자체의 하나의 속성이다.
우리가 매순간 대상과의 접촉(밖이라고 하는 외부경계나 안이라고 하는 자신안에서의 생각이나 감정, 느낌 모두가 대상과의 접촉이다.)에서 인식이 일어날 때 알아차림도 항상 같이 있다.
그러한 인식이 작용될 수 있는 원리 자체가 바로 '공'이라고 하는 성품인데, 그 '공'이라는 성품 스스로 가지고 있는 고요함이 정이고, 밝음이 혜다. 이 혜의 발현, 혜로서의 통찰이 시작되는 것을 '깨어있음'이라고 표현한다. 100프로의 혜의 켜짐을 반야라고 한다. 물론 달개비식의 용어사용이다.
사티, 즉 알아차림은 이 '깨어있음'의 첫걸음이다.
처음 시작해서 얼마 동안에는 실제로 알아차림, 즉 자각은 수행자 자신이 알 수가 없다.
즉 매순간 인식과 동시에 알아차림이 같이 있는데 늘 인식의 내용에 함몰되고 동일시 되기 때문에
그러한 '모든 짓'을 나투는 그 마음의 바탕, 주시자를 잊고 있다.
그러한 그 마음의 바탕, 주시자의 관점, 그 주시자의 각성이 사티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사마디나 사티가 약한 수행초기에서는
아직 사티가 각성(깨어있음)의 성격을 띄지 못하고 - 즉 주시자가 드러날만큼 주시자의 작업(생각, 느낌, 감정등의 내용과 작용)이 조용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 수행자 입장에서는 자의식만 포착된다. 그럴때 자각은 감지되지 않기에 어느새 '알아차리고 있네'라는 하나의 사고로서의 자의식발동 상태가 된다.
어느 정도 사티의 힘이 강해졌을 때 사티나, 사마디(사티집중)를 수행자가 자각할 수 있는데 그러한 자각은 '자의식 - 사고'형식이 아니라 '각성 - 혜의 발현 - 혜'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 과정상의 언급은 사실 한도 끝도 없다.
각 공부자의 그때 그때 현존에 따라 심도있는 질문이 나오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