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 사티에 대하여

사티를 알려면 우선 기본적 마음구조를 알아야 한다.

사물을 본다, 듣는다, 하는 육식에 대한 끊임없는 접촉이 오온. 그 오온의 몸짓, 마음짓이 존재이다.

그 접촉에 의해서 발생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음이 무명이다. 즉 기억으로 덮어서, 이름(개념)으로 덮어서 실재를 가린 환상을 보게된다.

그래서 대상과 접촉하고 그 접촉에서 내가 발생하고 보이는 것이 발생하고 그리하여 우주가 발생한다.

그러면 바로 그러한 접촉과 접촉후의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들을 잘 보는 것, 관찰하는 것, 그리하여 왜곡시키지 않고 덮어씌우지 않은 있는 그대로를 보게 되는 방법이 사티라고 하겠다.

사물을 볼 때, 그 순간에 그 대상에 대한 상, 즉 이미지가 생겨나는 것이지 사물 자체가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가 생겨나는 것을 인식이라고 한다.

그 인식의 과정 상에 사물을 있는 그대로 사건 그대로만 보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그러나 그 사이에 기억(개념, 이름)이 들어가면서 있는 그대로의 실제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기억의 정보로 덧칠을 한다.

그러므로 실제와 멀어진 왜곡과 가공된 것이 생겨난다.

사티는 무의식적 일련의 행과 업, 그 모든 것을 의식화 하여 알아차려서 정확한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현존을 밝히는 힘.

본래 우리 마음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바탕으로서의 각성이다.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을 볼 수 없다는 것은 기억 속에 정보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과 함께 색수상행식이 같이 달라 붙어 있는 것이다.

나라고 동일시 되어있는 <나의...>라는 잣대, 안경을 쓴 채로 본다는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습관은 너무도 빠르기 때문에 그것을 놓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가지 방법이 필요하다.

  1. 의식을 한 걸음 멀리 두고 기준점에 유의를 한 채로 사물을 인식하는 것으로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발걸음, 호흡, 주의점의 기준점에 유의를 한 채로 면밀히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보는 동시에 생각이 들어가고 기억이 연상이 되어지고, 그것과 관계된 감정도 역시 바라보는 연습을 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알아차리는 힘을 길러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대상에 끌려 갔을 경우는 감정과 같은 것에 한눈이 팔리게 된다.

깨어 있어면서 무선택 무관점적 주시하는 힘은 즉, 한눈 팔지 않는 힘을 말하는 것이다.

대상에 끌려 갔을 경우는 알아차리고 다시 기준점으로 돌아가면 된다. (호흡법 혹은 이름 붙이기, 그리고 다시 멈추고 기준점으로 돌아가기)

두정이나 호흡이나 혹은 들숨날숨이든 아무 것이나 상관이 없다.

그러나 한 시간이나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을 들여서 강도가 높게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생각을 끊으려는 입장이 아니라 생겨나는 사고를 기다리는 입장이다.

알아차림이란 의미는 그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티는 나라고 하는 것의 모든 짓을 면밀히 알아차리고 봄으로서 나라고 하는 것의 정체, 그 나와 대상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현상, 그리고 나아가 나와 대상사이에 거리가 없음을 보는 것이며, 알아차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순식간에 일어나는 다단계의 모든 것들을 보아주겠다는 의도에서 출발한다는 말이다.

사티 힘이 깊어지면 기준점이 필요가 없다.

이 힘이 강해지면 각성이 생겨난다. 사티가 사마디와 각성이다.

각성은 혜를 발현시킨다.

각성이 강해지면 변화하고 생멸하고 무상한 끊임없는 것들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나라고 할 것이 있을 수 없구나 하는 삼법인이 드러난다.

이 방법이 위빠사나가 이루어지는 사티수행이다.

  1. 또 하나는

사마디가 이루어지는 사티수행이다.

접촉이 생겨나면 그 접촉점 즉, 개념화가 일어나기 직전을 포착하여 강하게 순간적으로 봄을 밀착하는 것을 말한다.

마음의 거울에 상이 생겨날 때 그 때마다 사티로 밀착되는 것을 말한다.

식사를 할 때, 또는 호흡등등 그 상황과 조건에 주어진 경계에 거리(개념이 낄 시간)를 두지 않고 밀착되는 것이다.

밥을 먹을 때 온통 밥을 뜨고 입에 넣어 씹고 맛이 느껴지고 목구멍에 삼키고 내려가는 그 과정 하나하나에 전면적인

몰입이다. 호흡이라면 들숨에 그 공기가 코를 통해서 가슴으로 그리고 온몸에 까지 퍼져 나가는 또 온몸에서 태우고

나온 공기(이산화탄소)가 가슴을 지나 코로 입으로 나가는 그 전체과정을 세세하게 면밀히 느끼면서 몰입하는 것이다.

이러할 때 개념화가 끼어들 여지가 없어지고 사고가 줄다가 없어지면서 깊은 침묵(멸진정)이 드러난다.

점점 사티의 힘이 강해지면 일종의 현미경의 배율이 높은 상태에서 물질을 관찰하듯이

전광석화같이 지나쳐버리던 마음순간들이 체감적으로 무척 시간이 늘어간것처럼 즉 천천히 진행되듯이 느껴진다.

일종의 마음과정의 배율높이기다.

침묵(止, 사마디)과 각성(慧, 통찰)이 균형이 잘 맞고 사티순도가 100% 일 때 막가파라에 든다.

절관이 일어나면서 사티도 일시적으로 끊어진다. 이것이 막가이다.

니르바나를 지나 파라로 나온다. 파라로 나올 때,

막가에 들어갈 때 얼마나 깊게 절관이 이루어지는가 즉 무의식까지 아싸봐가 끊어져버렸는가에 따라

반야(무분별의 분별지, 후득지)의 불밝기에 차이가 있다.

개인차가 있으므로 4번 정도의 막가파라에 들도록 수행을 한다.

또 하나 참고로

사티에 의한 관이 아닌

생각(사유)을 통한 관이 이루어져 연기법을 깨닫거나 삼법인을 깨닫거나 하는 경우

그 깨닫는 주체가 무의식(말라야식)의 '나'라는 기반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표면의식에서는 무아이고 무상이라고 알아 문제가 없으나 즉 이사무애는 되는데 사사무애에 장애가 일어난다.

즉 무의식적인 '깨달은 내'가 있게 되어 아취, 아만등이 미세하게 남아있게 된다.

그러므로 자의식이 아닌 사티로의 주시, 관찰 수행은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