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16. 渾然 - 無相의 相

먹고 자고 말하고 수족을 움직이고

구름이 떠가고 강물이 흐르고 나뭇잎이 떨어지고

꽃잎이 돋고 바람에 문풍지가 떨리는데

거기에 추호라도 相이 끼어든다면,

그것은 마치 混沌을 도려내고 眼晴을 가렸더니 도리어

혼돈이 죽었다는 莊子의 우화와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

[덧붙임]

상이 끼어들어도, 또는 상이 끼어든다면..... 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이원적 관점의 말들이다.
일진법계인 실재는 상이 본시 상아님을 본다던가, 상이 끼어든다던가 라는 말들이 오히려 불필요 하다.
보고 자시고 할 틈도 없이 이미 무상의 상이요, 상 즉 무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삼 왜 우리는 말을, 법을 세우는 걸까.

장자의 혼돈이야기는 혼연한 곳에 새삼 눈을 만든다면, 상처가 없는 살에 흠집을 내는 모습이요, 대상적으로 표상한다면 이미 자신이 아닌 하나의 상이 생긴다는 것 즉, 시간과 공간이 생기고, 주체와 객체의 분리가 시작된다는 것이니 그렇게 착각하고 있는 주객으로 분리된 에고에게는 필요한 말이다.

언어는 이미 하나의 관점이고 그 관점이 의식의 어느 영역에 대한 말, 관점인가의 차이가 있을 뿐.
비이원에서 보자면 또 하나의 세움이다. 그러나 그렇게 세움 그대로 또 아무 일 없음이다.

온통 통채로 하나요. 모든관점 무관점에서는
온우주가 나요, 그대요, 내가 곧 진리고 그대가 곧 온우주이고,

두두물물이 부처요, 처처가 온통 하나인 일진법계요, 진여인데
거기엔 부족함도, 넘침도, 헛소리도, 참소리도 그저 그대로
진여의 묘용일뿐

Quote

참고) : 장자의 혼돈 이야기

장자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남해의 임금을 숙이라 하고 북해의 임금을 홀이라 하며,

중앙의 임금을 혼돈이라 한다.

숙과 홀이 때마침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이 매우 융숭하게 그들을 대접했으므로,

숙과 홀은 혼돈의 은혜에 보답할 의논을 했다.

사람은 누구나 눈, 귀, 코, 입의 일곱 구멍이 있어서

그것으로 보도 듣고 먹고 숨쉬는데 이 혼돈에게만 없다.

어디 시험삼아 구멍을 뚫어 주자.

그래서 날마다 한 구멍씩 뚫었는데,

7일이 지나자 혼돈은 그만 죽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