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17. 자기라는 존재감 자체가 저항.

[대형이 표현]

생각에 깊이 빠지는것,

지복감에 깊이 잠기는것,

공포에 점령당하는것

알수 없는 노래가 머리속에 맴도는것,

분노와 하나 되는것,

불안, 긴장감을 느끼는것,

자각 하는 것.

생존과 그 연결고리들을 깊이 고려하는것,

이것들은 무엇인가로 부터 회피하려 하는 것과 같은것 같다.

[달개비 표현]

자신의 모든 움직임이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이

그저 저항일뿐이라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알 때까지

물러남을 저항을 계속할 것이다.

그대의 모든 사고와 행위가

지금에서 물러나려는 하나의 저항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진실로 이해하게 되면

내면의 분리된 자기라는 존재감조차 하나의 저항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 시작한다.

그 어떤 노력도 즉 함도 하지않음도 모두 새로운 저항일 뿐임을

진정으로 명백하게 자각하면 비로소 일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그 때에

그대가 저항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온통 저항감만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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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이미 부처다, 이미 이루어져있다. 이미 깨달아있다.

이미 합일의식과 현재는 하나이자 동일한 것인데

사람들은 언제나 현재에, 합일의식에 저항하고 있다.

현재경험으로 부터 물러나려는 움직임.

무엇을 하려하든,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든, 바로 그 움직임이 첫단계의 오류다.

결론부터 말하면

합일의식(깨달음)을 가로막는 것은 바로 자신이 그런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하고 있는 표면의식적, 무의식적 현재의 활동 즉 회피와 저항이라는 원초적 활동이다.

그것은 지금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 대한 총체적인 망설임, 보지않으려 하는 회피, 수용의 거부다.

사실 사람들은 대형이의 표현처럼 '무엇인가로의 회피'로의 모든 짓- '무엇' 즉 합일의식을 원치않으며, 깨달아있는 현존 - 현재경험(합일의식)에서 언제나 도망치고 외면하고 저항하고 회피하고 있다.

물론 그 '저항과 회피'가 '열심히 산다'이기도 하다.

공부자가 접근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합일의식(깨달음 - 이미 여기므로 가고 올수가 없다) 자체가 아니라 합일의식에 대한 이 근원적 저항이다. 자신의 합일의식에 대한 저항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할 경우, 깨달음을 성취하려는 모든 노력은 허사로 끝날 것이다.

애쓰는 그것이 무의식적으로 저항하고, 또 애씀을 저지하려고 애쓰는 것의 반복의 악순환이기 때문이다.

표면에서 결사적으로 열렬히 소망하는 것을 심층에서 교묘하게 저지하는 일이 발생하고 이 저항이야말로 에고의 진정한 곤경이다.

바로 수행을 한다는 에고가 이런 구조의 '현실'이기 때문에

달개비는 무관점, 무선택적 알아차림 이라는 일종의 특수조건(사티)을 제시하는 것이고, 모든 함과 하지않음이라는 인위 - 저항을 좌절시킴으로써 보다 심층적인 무저항상태를 깨닫도록 저항을 드러내 보여준다.

제대로 된 사티는 자신이 어떻게 합일의식에 저항하고 회피하는지의 발견을 할 수 있게 하고,

그러한 저항(회피)의 발견과 이해, 명도를 이루게 하고 자신의 저항을 드러내 보여주는 동시에 저항을 좌절시킨다.

온통 저항이고 회피임을 보게하는 총체적인 통찰이 일어난다.

합일의식에 대한 저항의 파악은 처음으로 그것을 다룰 수 있게 해주고 마침내 저항(무명)을 떨쳐낼 수 있게 해준다.

합일의식 - 깨달음 - 현재경험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과 회피를 발견하고 이해한다는 것!

우리의 삶이, 몸짓이, 마음짓이 이 끊임없는 저항과 회피라는 것을 본다는 것!

이것은 그 자체가 매우 결정적인 통찰이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은 합일의식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디로부터 어떤 식으로 달아나는 지를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이해 자체가 합일의식을 약간이라도 드러나도록 해준다.

저항을 보는 것 자체가 저항으로부터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밤이 깊어지면 새벽이슬 냄새가 자꾸 코를 스치지.

새벽이슬 냄새 나는 우리 대형이의 글이 반가와서

달개비 글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