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02. 연어
플로티누스는 두 가지의 죽음을 구분한다.
그 하나는 자연적인 죽음이요, 다른 하나는 자연적인 죽음에 앞서 올 수 있는 철학적 죽음이다.
철학적 죽음은 힌두교도의 목표다. 그러므로 작품을 이룩한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오직 정신의 방향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현실과의 관계는 끊어졌고 또 다른 세계와의 사이에 새로운 다리가 놓인 것이다.
소위 세계라고 이름하는 것에 대한 점진적인 혐오를 상상해 보라.
그리고 삶과 죽음이라는 저 영원한 쌍(雙)의 소멸을, 그리하여 마침내 얻게 되는 계시를 상상해 보라.
갑작스럽게 정신이 휘청거리면서 그가 [그것 Cela]을 보게 될 때의 감동이란 얼마나 대단할까?
이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저 다른 것도 아닌 그것. 그 자신도 아니요, 그렇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그것. 서로 구별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닌 그것.
그가 부러워하는 대상도 아니요, 혐오하는 대상도 아니다. 욕망의 대상도 증오의 대상도 아니지만 감지할 수 있는 대상.
마음에서 가까운 그 무엇도 아니고 수를 셀 수 있는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
그는 뒤로 돌아서도 동시에 [그것을] 본다. 그는 돌연히 그리고 마치 의기 투합하듯이 밤낮으로 [그것]과 함께 있다는 것을 느낀다. 태어나고 사멸하는 모든 것의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도대체 그것은 어떤 모습을 가진 것일까? 그는 나에게 무어라고 말하는 것일까? 사물도 사람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아무것도 그 누구도 아니다. 아니다. 그대는 [그것]이다. 항구적이지 않은 것을 통해서 항구적이며 부재 속에 존재하며 공(空) 속에 산재한다.
이해할 필요도 없이 나는 그것을 만져보기만 하면 된다. 비록 내가 그것에서 헤어난다 한들 그것을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아니 과연 이제 내가 그것에서 헤어날 수 있기나 한가?
내게는 그것이 아쉽지만 그것은 나를 아쉬워하지 않는다.
세계는 저절로 주어지는 구경거리이며 나는 그 구경거리의 장면들이 현실이며 그 배우들이 현실임을 믿는다. 세계는 오직 내가 깨어 있는 순간에만 제가 부재함을 알린다. 어깨에 기대어오는 머리처럼 존재의 가벼운 움직임. 그러면 어느새 세계는 홀연히 사라지고 그는 세계의 버팀대처럼 나타난다. 그러나 나는 보다 직접적으로 그것과 하나가 될 수는 없을까?
내가 나의 가장 깊숙한 것 위로 기울어지면 나는 존재하기를 그치며 나는 이제 내가 아닌 것이 된다. --- 그리고 남도 아니다. 나는 [그것]이다. 나의 사고와 나의 욕망들은 그것들을 불러일으키는 그이에 비한다면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잠들면 나는 [그것]에 가까워지고 내가 죽으면 나는 그것과 하나가 되려 한다. 나는 돌이 우물 속 깊이 떨어지듯 그의 속으로 떨어진다.
어느 힌두교도의 말 : 중요한 것은 우주를 한 바퀴 도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중심을 한 바퀴 도는 것이다. ------- 꿈 이야기를 쓸 수는 없다. 그저 꿈에서 깨어날 뿐이다.
장 그르니에
언젠가부터 여러번 만났던 이 글을 다시 읽고있던 어느날...
그는 나를 만나고 나를 이해하고 나를 관통하고 나와 하나가 되고 기어이 내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제 다시 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