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 쉬시오

이름표(언어)라는 것의 구조적 맹점은 진의의 체험도 없이 멋대로 범람한다는 것.

즉 제법 '그것'인 척 스스로를 속인다는 것이다.

한 예로 '지금, 여기에 있으라'라는 말은 무척이나 일반화되어 쓰고있다.

사실은 모든 사람이 그 용어를 극도로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사고에서 '지금 여기에 있다'는 '죽는것'과 똑같은 순간이다.

만약 진정으로 철저하게 '지금 여기'에 있다면 실직적으로는

전면적인 마음의 죽음과 똑같다.

만약 진정으로 '지금 여기'라면 그대는 이미 벌써 대오한 것이다.

굳이 깨달음이니 해탈이니 하는 거창한 명분같은 것은 없습니다 라고 스스로 소박하게 말하는 사람들조차도 조금이라도 자기 개선이나 자기 변화라는 기대가 있는 한

항상 명상 속에 있어도 무언가가 지금보다 달라진, 개선된, 좋아진, 훌륭해진......을 바라는 명상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는 실현되지 않는다.

에고가 '자기 변화'라는 과제를 갖고 있는 한 성과를 늘 확인하려 든다.

그래서 '하 는 것'은 그것이 공부든 성찰이든 수행이든 정신적 욕망, 에고의 연장선이다.

관조란, 일어나는 것이지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여기 있음'은

더 나아진 어딘가로 가거나 오거나를 넘어선다.

가려고...... 하려고......의 사고의 멈춤이다.

그대가 이해하거나 오해하기 이전!

그대가 비교하거나 검증의 사고가 시작되기 전!

아주 잠시만, 한 번만......

쉬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