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01. 수연무작(隨緣無作)

우리 새삼스럽지만 차분히 초발심의 눈으로 정리 한번 해보자.

이 세상은 지금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

실재 를 표현 하는 말들

연생(緣生)은 무생(無生), 무생법인(無生法忍 : 일체만유가 생겨나는 일도 없고 사라지는 일도 없는 진리), 불생불멸, 불래불거. 일진법계..... 이 말들 그대로다.

지금 목전에 무수한 것들이 생겨나고 사라지고 어른거리지만, 그 모두가 인연에 의해서 말 그대로 생주이멸을 하고 있어 그것을 제행무상이라 하고 그리하여 그 성품이 비었음에 제법무아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의 삼법인을 체득한다는 말은

지금 이 온갖 것을 다 지우고 쓸어내 없애라는 소리가 아니고, 온갖 것이 온갖 것인 채로 온갖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투철히 꿰뚫으라는 말이다.

온갖 이런 것, 온갖 저런 것이 그대로 비었음을 뚫고 나면 온갖 이런 것, 온갖 저런 것 사이를 무애하게 지지고 볶고 다 하는 것이다. 슬플 때 슬퍼하고 즐거우면 즐거워하고,..... 있는 그대로

질문 여정으로 돌아와서

그냥 본다. 모든 걸 다만 맑은 거울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듯이 취하지도 버리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본다. 그러다 보면 시(是)도 비(非)도 다만 빈 말일 뿐, 그 마음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그런 경지에 대하여 "아, 좋구나, 이렇구나, 저렇구나, 이 이름표가 무얼까..... " 시작하면 물론 또 '나'에 걸린 것이지만 여하튼 그쯤 되면 걸리면 걸린줄 알면 되니 걱정이 필요없다.

무심이라는 것은

함이 있네, 함이 없이 하네, 무심이네, 무심이 아니네라는

생각 자체가 서지않는, 이미 생각이, 분별이 멈춘 곳이다.

기실 무심이면 즉사(卽死)고 즉사면 바로 견성이다.

마음은 늘 그대로이고, 생각은 저절로 비었고, 그럼 안팎으로 아무 일 없잖은가.

생각이 그림자처럼 일렁이지만, 나지 않음을 알아서 좇지 않고, 모든 게 그대로 비었음을 꿰뚫어 텅빈 투명한 마음뿐임을 알아서 일거에 만법을 좌단하고 성품을 돌이키면, 무명이 그대로 깨어있음과 다르지 않다는 걸 체득하게 된다.

경지니 무아니 무심이니 뭐니 · · 그런 말들 전부 털어버리자.

지금 그 질문한 게 누구인가?· · · 빌려 쓴 말들은 진제의 말들을 썼는데 지금 그 의도는 어느새 철저히 세간적 이분법이다.

이 세상에 인연으로 말미암지 않고 나는 법은 한 법도 없다. 즉 그 자체로 성품이 없다는 말이다. 이대로 그대로 하다는 말이다.

누구냐? 한 마디로 이 '나'란 놈이 죽었느냐? 라는 것이다.

무심이니 무아니 라는 말을 하는 놈이 누군가?

그 소리를 이 '나'란 놈이 하고있지. 그러니 그런 채로 '이놈'이 무아의 경지를 얻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해도 그 '나'란 놈만 점점 강화될 뿐, 정작 밝혀야할 본래의 빛은 점점 가려지는거다.

만법의 성품은 이요. 무생성(無生性)인데 도대체 무엇을 '나'라고 하는가 이 말이다.

어디를 찾아봐도 '나'라고 할만한 게 없다. '나'가 없으니 모든 문제가 본래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 거기서 그렇게 귀를 세우고 묻고 있는 것은 깨달음이라 불리는 어떤 것, 어떤 곳으로 가고자 함, 즉 확철한 깨달음을 구하는 '나'가 있음이다.

여전히 '나'다. 무아의 경지를 불이의 경지를 알았다 해도 그렇게 아는 '나'가 있고, 하는 '나'가 그렇게 한 보람으로 인해 이 '나'가 깨달음이라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면 그게 무엇이 되었건 그건 가짜다.

매 순간순간 보고 듣는 가운데 내 생각, 내 입장, 내 식견, 그런 것들을 전혀 개입 시키지 않고 그냥 보는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냥 볼 수 있는 데에는 '나'라고 하는 놈이 없다.

진여라고도 하고 마음이라고도 하고 본래면목이라고도 하고

순수의식이라고도 하고 깨어있음이라고도 하는 이면서 색으로 나투는 그 각성이 순간순간 환히 스스로 빛을 나투고 있을 뿐이다.

수연무작(隨緣無作)이라, 다만 인연을 따르되 작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