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생활과 공부의 조화
공부의 출발지, 또는 여정 중에서 느끼는 딜레마는 소멸과 생존과 인간으로서의 생활과의 아슬아슬한 조화입니다. 각자 나름대로의 노하우로 할 테지만 이 생활과 공부의 조화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자신을 잘 관찰하는 훈련, 방법등을, 또 제대로 안다는 것, 제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과연 이 우주의 실재가, 이 '나'의 실재가 무엇인지까지의 여정으로 들어서는 것이 이 공부이다.
삶의 질곡에서 도피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면적으로 고통의 한가운데로 용기있게 걸어들어가는 직시를 배우는 일이다.
진정으로 자기자신의 본래면목을 발견하고 오롯이 자신 그 자체로 있게 되는 공부이며,
이 공부의 첫번째 길은 솔직함이다.
솔직함은 있는 그대로의 전면적인 인정, 긍정이다.
그대가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개념'과 '사실'의 혼돈이다.
이 간과는 모든 도반의 현존이기도 하다.
처음 질문의 '사사무애'도 마찬가지이고 지금 생활(삶, 생존)과 공부(소멸)의 조화라는 물음도 역시 같은 맥락인데,
그대는 삶이 무엇인지 모른다. 생존이 무엇인지 모른다. 또는 조금 알것 같다. 또는 조금 그것이다?
그대는 소멸이 무엇인지 모른다. 깨달음이 무엇인지 모른다. 또는 조금 알것 같다. 또는 조금 그것이다?
그대는 事를 모른다. 하물며 事事간의 無碍를 말하겠는가
그대는 아직 소멸하지 않았고 '나'가 있으며 탐진치즉보리의 현존이 아니라 '나있음'의 탐진치이다.
'내'가 있는 삶이고 '내'가 있는 소멸이고 '내'가 있는 탐진치고 '내'가 있는 깨달음이다.
물론 표면의식에서야 '나'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공부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전체 의식의 빙산의 일각이고 무의식의 '아상'은 아직도 첩첩산중이다.
그러한 자신의 현존을 직시하고 스스로에게 솔직한 것 외 그 어떤 개념{삶, 죽음, 저기, 깨달음적 앎, 무아, 소멸}도 다 쓰레기다.
즉 그대는 지금 여기 있다.
이 기가막힌 사실을 직시해라.
그대는 지금 여기 있다.
지금 당장 여기 있는 그대로의, 현재의 꼴 그대로
즉 에고의 한가운데이던, 탐진치의 한가운데이던, 그래서 유아인 현존이던, 실존의 현존이던, 무아의 현존이던 간에,
그대 -그대가 없어서 오로지 그대이던, 온통 그대 아닌것으로 그대라고 부르는 그대이던 -
오직 그대 밖에 더 없다.
그러하니
지금 그대가 유아이면 정확하게 유아꼴을 지어낼수밖에 없고
지금 그대가 탐진치이면 정확하게 탐진치의 꼴을 쏟아낸다.
지금 그대가 무아의 현존이면 정확하게 어디에도 그대는 없이 그대이다.
여기에 무슨 삶과 소멸과 생활이라는 개념의 부딪힘이 있는가?
소멸이 소멸이 아니고 그 이름이 소멸이다.
삶이 삶이 아니라 그 이름이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