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12. 무수지수
존재의 궁극이자 모든 존재의 바탕
즉 절대라는 '그것(진여, 공, 순수의식......)'은
상징과 기호로 잡기에 너무나 단순하고 너무나 명백하며 너무나 가까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말로 표현해내기에는 너무나 신비롭거나 너무나 숭고, 또는 복잡, 심오한 그 어떤것이라는 식으로 상정하는 오류를 범한다.
상정한다는 말은 곧 지금 여기가 아닌 딴 곳을 바라본다는 얘기이다.
늘 불성실하고 진지하지 못함 즉 전면적이지 못하고 솔직하지 않은 지금 여기 !
그저 스쳐가고 외면해버리고 도망치고서는 대충 불만족스럽다고 여기는 지금 여기 !
그래서 초월이라는 어의가 풍겨내는 분위기에 혹하여 지금 여기가 아닌 이대로가 아닌 그 어떤것, 그 어디라고 멋대로 상상해버리고는 열심히 쫒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전적으로 이원을 초월한다는 것, 분리와 경계가 없음이라는 것은
바로 초월이고, 절대이고, 궁극이므로
전적으로 모든 곳에 모든 것에 내재하는 것, 편재하는 것이지않은가.
그래서 곧 '그것'은 바로 '무시간성이고 무공간'이고, '항상', '여여'인 것이다.
차원이나 외연이 없는, 날짜와 기간이 없는 순간
아무곳에도 없지만 없는 곳이 없는.
그것이 전존이다.
그것이 '지금 여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깨달음을 획득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일진법계가 아니었던 지점에서 이제 일진법계인 지점으로 이동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말인데...... 일진법계가 무엇인가. 전존이 무엇인가.
그 자신이 전체이자 연기인데 어디에서 어디로 간단 말인가.
자신은 공이 진여가 아닌 곳, 중생인 곳, 무명만 있는 곳, 합일되기 전의 분리된 한쪽만 있는 곳, 연기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곳......에 있다라는 억지를 부려야 할 판인데
어찌된일인지 그런 억지를 참 질리지도 않고 끈질기게 상상하고 고집 한다. 것도 묘용이다.
그러하니
이미 여기인데 이미 부처인데
이런 저런 수행으로 이러한 하나됨을 얻을 수 있는 척 하는 짓이야 말로
이미 여기이고 이미 부처인 곳에서의 끊임없는 도피행위이자 분리와 경계를 고집하는 일이다.
추구하고 쌓아서 깨달음을 획득하고
여기가 아닌 깨달음이 있는 그 어떤 곳으로 가고
없음에서 무언가 새로운 능력있음으로의 변화되고 하는....... 그 모든 것 - 수행을 포함한 삶의 모든 몸짓, 마음짓- 육식의 작용이 일어나고 그러한 작용을 할 수 있게 하는 그 자체로의 눈돌림.
그리하여 할일이라고는 여태껏 그러한 한눈파는 일을 멈추는 것뿐.
그것이 무수지수이다.
이 순간,
그대가 이런 획득 불가능성을 스스로 명백하게 확인하고
참으로 전혀 아무것도 얻을 수 있는 것이란 없음을 명백히 이해할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지혜의 마음 그 자체이다.
황벽의 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