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01. 달개비 이야기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난다.
보통은 자신들의 성장을 위한 하나의 장소 혹은 변화를 주기 위한 동기나 무료함을 달래는 정보로 사용하려는 미묘하고도 심리적인 이해관계로 만난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관계는 긴장이다.
그러한 긴장의 연속이 세속에서의 존재방식이다.
도, 깨달음, 선, 테라피나 명상을 기대하거나 호기심을 갖는 것 역시 결국은 성장, 성취, 옳고 그름의 동기를 갖는 모든 탐구, 즉 구도라는 이름의, 명상이라는 이름의 이기심이다.
호기심을 갖거나 기대하거나 두려워하거나 경멸하는 것은 물론 그대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사고가 하는 짓이다.
한가지 시험해보라.
다음에 달개비와 만날 때, 만나기 전 혼자 있을 때의 자기의식을 느껴보라.
그 다음에 달개비 또는 다른 누군가를 만날 때의 의식을 잘 보아두라.
혼자가 두 명이 되면 무엇이 어떻게 바뀌고, 무엇이 변하는지?
변하는 것은 기분이나 사고이며 환경의 자극이다.
그대들은 달개비를 만난다.
그럴 때 그대가 할 일이라고는 달개비와 만남으로써 그저 '있음'이면 된다.
그저 '있음'이라는 것은
일종의 무관점, 무선택이라는 무관심으로 있음이다.
보통 관심의 상대어적 무관심이라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하려고, 보려고, 느끼려고, 들으려고의 무관심이다.
무관심한채로 그저 '있다'에 중점이 되면, 달개비가 자주 사용하는 '깨어있음'이다.
그러면 그대 눈앞에 달개비가 있든지 없든지, 평생 달개비와 함께 있게 된다.
그러나 세간에서 그처럼 관계적인 행동도 없이 대답도 없이 침묵하면서 조용히 있기만 하면, 실례라든지 어둡다든지 긍정적이지 못하다는 참견인들의 허튼 소리가 시작되는 것이다.
때문에 그대는 이 세계에서 모처럼 달개비와 있을 때에는 전혀 긴장할 필요가 없다.
달개비는 그대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에 흥미가 없다.
그대가 좋아지거나 싫어지거나, 또는 그대를 칭찬하거나, 경멸하는 판단자가 아니다.
또한 그저 존재자이지 그대에게 점수를 매기는 '채점자'도 아니다.
그대는 그대의 학교, 회사, 가정, 연인이나 스승들에게서도 그러한 판정과 체점을 계속해서 실컷 받으며 자라왔다.
달개비는 때때로 그대에 관해 어느 정도 지적을 하고 관찰도 한다. 그러나 비판을 위한 지적과 관찰이 아니다.
항상 기본적으로 그저 그곳에 있을 뿐이다.
때문에 몇 번이나 말했듯이,
달개비를 표현할 때 그것은 진정 한 포기의 잡초 혹은 안락한 쇼파, 바람 한 줄기와 같은 존재이다.
무엇을 하려고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대과 함께, 그저 있는 존재일 뿐이다.
그저 그 상태가 인간에게 초래하는 깨달음에 그나마 가까운 상태를 갖도록 하기 때문에
그대가 '그대로 있음'에 익숙해지게 함으로 진정 그곳에 도달시키려 한다.
혼자라도 다수와 있어도 그저 '있을' 수 있다면 그대는 달개비를 만날 필요가 없다.
그래도 만나게 되면 그저 친구로 만나 밥 한끼 나누던가 잡다한 일상의 대화를 나눌 뿐이다.
때문에 달개비는 수행자를 모으지 않는다. 달개비는 조용한 존재자와 함께 할 뿐이다.
궂이 달개비의 명상법을 묻는다면 '구하지 말라'다.
그러니 무언가 구할 것이 있고, 얻을 것이 있는 수행자에게 달개비는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